세계 종교 탐구 <23> 진실한 역사를 찾아서 (2)
우리나라에 6000년 역사를 지닌 도시가 있다. 바로 한강이 관통하는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이다. 정확히는 서울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강동구에 있다. 1925년, 큰 홍수로 한강 변 모래언덕 지대가 심하게 파이면서 유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후 12차에 걸친 조사 및 발굴작업을 거쳐 이곳이 6000년 전 인류가 살던 거주지임이 밝혀졌다. 유적의 생성 연대를 분석한 결과, 서기전 4천 년경으로 측정된 것이다. 이에 강동구는 현재 ‘6천 년 역사 도시 강동구’라는 슬로건을 내세워,<사진1> 암사동 유적지 진입로를 ‘6000년 역사를 간직한 문화예술의 거리’로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흔히 반만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서기전 2333년(단기 1년)에 우리나라가 세워졌다는 건국 신화에 근거해 약 4300년을 반만년이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강동구를 비롯해 한반도 곳곳에서 더 오래된 옛 인류의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에는 70만 년 된 국내 최고(最古) 유적지가 있으며, 북한의 황해북도 상원군에는 무려 100만 년 전 유적이 발견되었다. 덕분에 우리나라 인류 거주의 역사가 과학적 실증 없는 건국 신화에 근거해 5000년도 채 되지 않는 실체 없는 역사로 남을뻔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20세기 들어 크게 발달한 ‘고고학’이다.
고고학은 유물과 유적 등을 발굴, 수집 및 분석하여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역사학과 같이 사료를 평가·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역사적 진실 규명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고고학과 그와 동반한 지질학, 화학, 생물학 등 과학의 발달은 인류 역사에 새로운 진실들을 안겨다 주었다.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고고학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들을 소개하고, 드러난 진실을 받아들이는 이상적인 자세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 고고학 발달의 기폭제, 연대 측정법의 발달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 거주지의 역사가 100만 년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 거주지의 역사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 작년에 발견된 남아프리카 본데르베르크(Wonderwerk) 동굴의 유적이 180만 년으로 가장 오래되었다. 작년 4월,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와 캐나다 토론토대,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공동 연구진이 발표한 연구 결과이다.
연구진은 동굴 바닥을 이루는 퇴적층에서 인류가 사용한 다양한 석기와 불을 피운 흔적, 동물의 유골 등을 발굴했다. 이것들이 180만년 전의 물질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히브리대의 론 샤아르 교수는 “인류가 180만 년 전 이 동굴에서 올도완 석기(초기 뗀석기)를 만들었다고 확신한다”며 지자기(地磁氣)를 이용해 연대를 측정한 원리를 설명했다.<사진2> 이어서 히브리대 지구과학연구소의 아리 마트몬 교수는 모래의 성분인 석영에 포함된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법도 소개했다. 이렇듯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얘기할 때는 사용한 연대 측정 방법이 함께 설명된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두 가지는 ‘언제’와 ‘어디서’인데, ‘어디서’에 대한 답은 발견 장소에서 흔히 얻을 수 있지만, ‘언제’라는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답할 수 있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고작 60년 전이다. 발견된 물질이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물질인지 절대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이 약 60년 전에야 상용된 것이다. 절대연대 측정법의 효시는 1949년 미국의 화학자 윌라드 리비가 개발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다.<사진3>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은 방사성 탄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정량 감소하는 성질을 이용해 연대를 추정하는 방법으로, 1960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은 고고학, 인류학, 지질학에 크게 공헌하며 14C(방사성 탄소)의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브리안 파간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의 등장으로 고고학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평했으며, 미국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뉴욕타임즈는 “더 이상 시간을 부풀리는 사기꾼들의 협작에 놀아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과 관련해, 사람들은 윌라드 리비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평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 사용된 사례로는 서울 강동구의 유적지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시체를 감쌌다고 주장하는 토리노 수의의 연대 측정을 들 수 있다.<사진4> 연대 측정 결과, 우리나라 인류 거주의 역사는 건국 신화와 달리 반만년이 넘고, 토리노 수의는 예수 사후 1300년경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며,<사진5> 역사는 또 한 번 진실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 고고학을 통해 옛사람을 만나다.
1859년,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저서『종의 기원』을 출판하며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진화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다. 이후 과학계에는 진화론이 대두되었고, 고고학자들은 인류의 기원을 찾아 나섰다. 진화론 추종자들은 고인류를 짐승처럼 울부짖는 미개한 원시인의 모습으로 상상했다. 그러나 최근까지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 고인류의 모습은 현생 인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0년, 이라크 자그로스산맥의 샤니다르 동굴에서 웅크린채 누워있는 5만 년 전의 인류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사진6> 고인류 학자들이 무덤을 채운 흙을 분석하자 여러가지 꽃가루가 검출되었는데, 어떤 꽃가루는 뭉텅이로 놓여져 있던 것으로 보아, 막 꺾은 꽃다발을 시신 위에 놓은 흔적으로 추정되었다. 2020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고고학 연구팀은 샤니다르 동굴을 재발굴하여 새로운 인류 유해를 찾아냈다. 조사를 마친 연구진은 망자를 매장할 때 꽃을 바쳤던 이 풍습이 단순히 시신 매장만의 목적이 아니라 고인을 추모하는 ‘장례 의식’이라고 단언한다. 연구진은 “이번 발굴의 핵심은 매장의 의도성으로, 고인류에게도 복잡하고 상징적이며 추상적인 사고능력과 망자에 대한 동정심, 나아가 상실감과 추모 감정을 가졌음을 시사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고인류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인간의 언어 구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FOXP2 유전자가 현생 인류와 똑같은 것을 확인하였다. 지난 2일 발표한 스위스 취리히대의 연구에 의하면 16만 년 동안 인류의 뇌는 바뀌지 않았으며, 생활 습관에 의해 얼굴 골격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했다. 지금까지의 여러 연구들에 의하면, 그들도 도구를 사용했고, 사냥을 하고 채집을 하고, 적갈색 안료를 사용해 몸을 치장하고, 그림을 그리고, 죽은 사람을 정성 들여 매장하고, 현생 인류 못지않게 유창한 말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고고학과 과학은 상상과 추측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고인류에 대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앞으로도 고고학과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옛사람의 생활 모습은 더욱 사실에 가깝게 복원될 것이다.
# 유명한 고고학적 사기 사건들
고고학은 기존의 학설과 상충하거나 새로운 증거가 나올 때마다 진실에 가까워지도록 끊임없이 수정되는 학문이다. 그런데 간혹 이러한 특성을 악용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역사를 수정하려 했던 자들이 있었다. 고고학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기 사건은 바로 ‘필트다운 사건’이다. 1912년, 영국 필트다운 지방에서 유인원과 인류의 중간 단계로 보이는 두개골과 턱뼈 등이 발굴되었다. 진화론자들에게 있어 이 발굴은 그동안 화석이 발견되지 않아 이른바 ‘잃어버린 고리’라 불려왔던 인류 진화과정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동시에 인류의 조상을 발견한 역사적 사건이었고, 학계에선 찬사가 쏟아졌다. 그가 발굴한 인류 화석은 발견 장소명을 따라 ‘필트다운인(Piltdown人)’이라 불려졌다.<사진7>
그러나 1953년, 의문을 품은 학자들이 X선 투시검사법, 불소연대측정법과 같은 여러 첨단 과학기술과 방법들을 동원하여 검증한 결과, 이 뼈들은 사실 중세 시대 인류의 머리뼈와 오랑우탄의 아래턱뼈, 그리고 침팬지의 송곳니인 것으로 밝혀졌다. 누군가 뼈를 짜맞추어 붙이고 표면에 약을 발라서 오래된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조작한 이유는 무엇이며, 왜 전문가들조차 오랫동안 가짜임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유감스럽게도 필트다운 사건의 범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작의 이유로는 영국의 국가주의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의 기원에 관한 책 『아담의 조상』에서는 영국이 인류의 요람을 유럽, 정확히는 대영제국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 설명한다.
필트다운인 이전까지 인류의 요람은 아프리카로 알려져 있었다. 330만 년 전부터 380만 년 전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의 화석 중 가장 오래된 것들은 모두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서양의 학자들은 최초의 인간이 문명화되지 않은 무지몽매한 대륙에서 탄생하였다는 사실에 심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트다운인의 발견은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던 서양 학자들의 꺼림칙한 기분을 완전히 해소해 주었으며, 그들의 흑백 논리에 딱 들어맞았던 사건이었다.
이것은 조작의 이유이자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시간이 지체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학자들은 이 발견물을 믿고 싶어 했다. 필트다운인의 존재는 진화론을 추종하거나 백인 우월주의의 사고를 가진 학자들의 신념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심리학 용어로, 자신의 사전 견해 및 태도와 일치하는 증거를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검증하는 ‘우리편 편향(Myside bias)’이 진실의 눈을 가렸던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사실을 거짓에서 구분해내도록 발달돼왔고, 과학적 검증 끝에 이 희대의 사기극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물 조작 사건이다. 1981년, 아마추어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미야기현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견한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고작 3만 년 전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단번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후지무라가 땅만 팠다 하면 더 오래된 유물들이 줄줄이 발견되었고, 그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덕분에 일본에 정착한 인류의 역사는 3만 년에서 무려 70만 년으로 급격히 앞당겨졌고, 후지무라 신이치는 일약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일본은 자신들이 당시 아시아 최고(最古) 역사를 갖게 되었다고 자랑했고, 그가 찾은 유적지들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성과들은 일본 역사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2000년 11월, 일본의 3대 신문인 마이니치 신문 1면에 후지무라가의 사기 행각이 포착된 증거 사진과 함께 그가 유물을 조작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사진8> 마이니치 신문이 그의 발굴 현장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결과, 아무도 없을 때 후지무라 신이치가 어디선가 가져온 유물을 몰래 땅에 파묻는 모습이 찍힌 것이다. 동영상을 보여주자 후지무라는 그자리에서 조작 사실을 인정했다. 조사 결과, 그는 직접 만든 유물을 묻어뒀다 다시 캐내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여왔으며, 20년 동안 무려 162곳의 유적을 날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가 유적을 조작한 이유도, 발각이 지체된 이유도 필트다운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78년, 한국에서 27만 년 전의 유적이 발굴되자, 후지무라를 포함한 일본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한국보다 짧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이러한 배경 속 후지무라의 발견은 일본 학계에서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고, 학계는 검증에는 소홀한 채 성급히 찬사만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후지무라 사건은 일본 학계도 공범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까지 소개한 두 사례는 고고학적 사기 사건 중 스케일이 가장 큰 사건들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 희대의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 드러난 진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하여
필트다운인은 발견 이래 40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 진짜로 인정받아 왔으며, 관련 논문이 200여 편에 달했기에 조작이었다는 사실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람들은 빠르게 진실을 받아들였고, 오늘날 ‘필트다운’이라는 단어는 ‘사기 부정 연구’를 조롱할 때 사용되는 대표적인 단어가 되었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업적에 환호했던 일본도 진실이 드러나자 단호히 대처해 나갔다. 후지무라 신이치는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며 눈물로 사과했지만 학계에서 즉시 퇴출 및 영구 제명당했다. 조사하여 가짜로 판명된 유물들은 국가 사적 지정을 전부 취소했고, 교과서에 실린 내용도 모두 삭제되었다. 출판된 그의 책은 모두 환수조치 되고,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도 모두 퇴출되었다. 일본의 고인류 역사는 전면 수정되었고, 70만 년이라는 거짓 역사를 다시 3만 년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들은 은폐와 합리화보다는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사실을 바로잡는 길을 택했다. 기실은 그것 외에 정도
(正道)는 없다. 드러난 진실 앞에 거짓이 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계에서 거짓말로 한 번 잃어버린 믿음은 다시 찾기 힘들다. 처음의 거짓말 위에 쌓인 후속 연구들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을 마주하고도 다른 자세를 취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스도교의 4대 교부 중 한 명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우리가 내다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 너무 성급하게 달려들기보다는 한쪽에 서서 우리의 입장을 더욱 견고히 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성급하게 계속 탐구를 진행하는 일은 오히려 우리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우리 역시 그것과 함께 추락하고 말 것이다.”라고 조언했다.<사진9>
그리고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기도 했다. “(라틴어)Plerumque … etiam non christianus ita noverit, ut certissima ratione vel experientia teneat. Turpe est autem nimis et perniciosum ac maxime cavendum, ut christianum de his rebus quasi secundum christianas Litteras loquentem, ita delirare audiat, ut, quemadmodum dicitur, toto coelo errare conspiciens, risum tenere vix possit. Et non tam molestum est, quod errans homo deridetur, sed quod auctores nostri ab eis qui foris sunt, talia sensisse creduntur, et cum magno eorum exitio de quorum salute satagimus, tamquam indocti reprehenduntur atque respuuntur. Cum enim quemquam de numero Christianorum in ea re quam optime norunt, errare comprehenderint, et vanam sententiam suam de nostris Libris asserere; quo pacto illis Libris credituri sunt, de resurrectione mortuorum, et de spe vitae aeternae, regnoque coelorum, quando de his rebus quas iam experiri, vel indubitatis numeris percipere potuerunt, fallaciter putaverint esse conscriptos?
(국문) 대개의 경우, … 기독교 비신자들도 많이 알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이성과 경험에 의한 명확한 것이다. 그런데 비신자에게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의미를 앞세우며 그러한 주제에 관해 사리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이다. 이는 기독교 신자의 엄청난 무식함을 드러내어 비신자들의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창피한 상황은 막아야 한다.
만약 비신자들이 자신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이 실수를 하고, 우리의 성경에 대한 그런 멍청한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경우, 기독교인들의 경전이 자신들이 경험과 이성으로 습득한 것들에 비해 오류로 가득하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면 어떻게 죽은 자의 부활, 영생의 희망, 하늘의 왕국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 아우구스티누스著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 中
그러나 그의 당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지구와 인류에 대한 고고학적, 과학적 사실들이 널리 알려진 가운데, 그리스도교의 학자들은 성경의 역사성과 진실성을 증명하겠다며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성서 고고학이라 명명했다. 열의에 찬 그들은 고고학적으로 실로 놀라운 성과를 이뤄낸다. 그러나 그 성과는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의 존폐를 고고학계의 뜨거운 감자로 만들게 된다. 분명히 고고학적 가치는 높으나 성서에 반하는 명백한 증거들이 계속 발굴되니, 고고학계에서는 근동 고고학 혹은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으로 용어를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학자이기 이전 신자(信者)인 사람들은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타나크(=구약성경)의 역사를 곧 자신들의 역사라 여긴다. 때문에 성서 고고학은 유대인 역사의 실체를 찾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현생 인류(진화론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당도한 것은 17만 7천 년 전이다. 이스라엘에서 17만 7천 년 전 인류의 화석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강동구의 역사가 우리나라 건국 신화보다 1700년 앞섰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의 건국 신화보다 17만 년 앞서게 되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데 과학적 실증이 있는 역사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구약성경을 따르는 아브라함계 종교를 믿는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 역사학 교수 슐로모 산드는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나의 동료들 가운데, 과거에 대한 틀에 박힌 거짓말들을 폭로하는 이 위험한 교육적 임무의 수행을 의무로 느끼는 이는 거의 없다. 나는 이 책을 쓰지 않고는 이스라엘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라며 학자적 양심에 따라 유대인의 진실한 역사를 담은 『만들어진 유대인』이란 책을 저술했다. 그의 책은 성공하여 전 세계 24개국으로 번역되며 널리 알려졌다. 그럼에도 이 책의 성취를 부정하는 역사학자는 나오지 않았고, 그 사실은 놀랍지 않다.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무신론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과학은 종교를 허물어뜨리고 지적인 사람이 신을 거부하도록 이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7세기 지동설을 주장했던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각은 달랐다.<사진10> 그는 ‘참된 과학과 참된 신앙은 둘 다 같은 저자, 즉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서로 일치할 수 밖에 없다는 명확한 전제’ 위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중심이던 중세 시대, 교회의 주장에 반하는 학설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종교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과학을 알려주는 것이 교황과 교회를 오류로부터 구하는 길이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가톨릭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주장 철회를 강요당했고, 죽을 때까지 집에서만 지내야하는 종신 가택 연금에 처해졌으며, 그의 모든 저서는 가톨릭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과학은 ‘검증의 학문’이라고 한다. 의문을 갖고, 가설을 세운 후 실험하여 검증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발견되는 오류를 수정해가며 점점 더 진실에 가까운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이 허물어뜨리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거짓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