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25> 그들은 왜 자발적 순교를 원하게 되었는가
수많은 종교들이 인류 역사에 출현했다 사라졌으며, 오늘날까지 존속한 종교들도 편안히 살아남지만은 않았다. 처음 발흥할 시기에는 기존 종교나 국가의 견제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타 종교와 대립하는 등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경우가 빈번했다. 종교들은 이러한 죽음을 ‘순교’라 부르며 이상적인 신앙의 자세로 여겼고, 순교자의 업적을 칭송하고 기렸다.
일반적으로 순교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행위로 생각되지만, 어떤 종교들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순교가 권장되었다. 심지어 순교의 고통과 죽음을 갈망하는 지경에 이른 종교도 있었다. 종교에서 순교를 이렇게까지 권장하는 데에는 순교 본래의 의미 외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여러 종교들의 순교 사례를 살펴보며, 그 이유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 마니교, 박해를 받아 사라지다
마니교는 3세기경 페르시아(現이란)에서 마니(Mani)가 창시한 종교로, 그리스도교와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을 융합한 새로운 종교였다.<자료1> 마니교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이원론적 교리를 가졌으며, 금욕주의적이고 전쟁과 살육을 부정했다.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칭했고, 기존 종교들은 후대 신봉자들에 의해 가르침이 타락되고 잘못되었다며 자신이 완전한 가르침 그대로 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니는 본인의 교리도 왜곡되지 않도록 직접 경전을 집필했고, 이를 여러 언어로 번역해 포교하며 특정 민족만이 아닌 세계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보편적인 종교를 창설하려 했다.
그러나 276년,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던 페르시아의 왕 바흐람 1세는 마니교가 국교를 해치는 사악한 종교라 판단해 마니에 사형을 선고한다. 마니는 26일간의 악형 끝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메시지를 남기고 순교했다. 제자들은 그 26일을 ‘빛을 비추는 자의 고통’ 또는 ‘마니의 수난’이라 불렀으며, 마니가 십자가형으로 처형됐다고 묘사했다. 제자와 신도들은 슬픔을 딛고 마니의 가르침에 따라 더욱 열심히 포교하여, 그 무렵 마니교는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어 세계 4대 종교의 반열에 오를 만큼 성장했다.
마니교의 확산과 성공은 다른 종교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졌으며, 그리스도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불교 문화권에서 크게 박해를 받았다. 29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바흐람 2세에 의해 박해가 일어나 사도 시신(Sisin)을 비롯한 많은 마니교도들이 학살당하였다. 296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마니교의 지도자들과 주동자들을 최고의 형벌에 처하여 그들의 혐오스러운 경전들과 함께 화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는 칙령을 발표했고, 그 결과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마니교 순교자가 발생했다. 또 381년 그리스도교인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마니교도의 시민권을 박탈할 것을 요구하였고, 테오도시우스는 382년, 마니교의 사제 혹은 승려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이 발표된 얼마 후인 386년, 본래 열렬한 마니교도였던 그리스도교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9년간 심취해있던 마니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결심했고, 이듬해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앞장서서 마니교를 비판하는 인물이 되었다.
5세기 무렵 마니교는 그리스도교로부터 이단으로 판정되었고, 그리스도교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서양에서는 6세기경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박해를 피해 동쪽으로 세력을 옮겨 포교했지만 중국에서도 박해를 받으면서 14세기 무렵에는 완전히 소멸되기에 이른다. 순교도 마다않던 신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여 년에 걸친 그들의 역사가 소멸되어 버린 데는 마니교가 세속 권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 정치적 측면으로서의 불교 이차돈 순교
‘참수할 때 목 가운데서 흰 우유가 한 마장이나 솟구치니,
이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이것은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이차돈 순교비의 기록이다.<자료2> 이차돈의 순교는 527년, 신라에 불교를 공인하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서, 이차돈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본보기로서 자신을 처형할 것을 법흥왕에게 청했고, 그를 처형하자 위와 같은 기현상이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순교라고 표현하기에 이차돈 순교 사건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보통은 종교를 박해하는 자가 순교자를 처형한다. 하지만 법흥왕은 이차돈을 처형한 바로 그해에 마치 순교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불교를 공인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방영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역사스페셜』에 의하면, 그 의문의 해답은「삼국유사」와「해동고승전」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법흥왕은 절을 지어 불교를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었고, 이때 법흥왕의 비서이자 당숙 관계였던 이차돈이 왕의 마음을 헤아리고 순교를 자청했다. 즉 이차돈의 순교는 법흥왕의 불교 탄압에 맞선 죽음이 아니라, 왕과의 밀약에 의한 정치적 결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순교라는 목숨을 희생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일까?
당대의 신라 사회는 일국의 왕이 절 하나도 마음대로 짓지 못할 만큼 귀족의 힘이 막강했다.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싶어 했고, 당시 우리나라에 전해진 중국 북위 불교의 ‘왕즉불’,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은 왕권 강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유용한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법흥왕은 이 불교사상을 수용함으로써 막강한 귀족세력을 해체하고 왕권 강화를 모색하려 했던 것이다. 법흥왕이 이차돈과 모의한 바, 법흥왕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측근인 이차돈을 왕명을 사칭해 절을 지으려 한다는 죄목으로 과감히 처형하기로 한다. 이러한 이차돈의 순교는 불교를 일으키려는 법흥왕의 의중과 더불어 왕을 능멸하는 자의 최후가 어떤가를 보여 줌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KBS에서는 이를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306~337년)의 그리스도교 공인에 비유하였다. 당시 로마는 4인 공동 황제 체제였는데, 나머지 황제들을 제거하고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고 싶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시 수많던 그리스도교인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왕권 강화를 위해 종교를 공인했다는 점에서 법흥왕의 불교 공인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이차돈이 모종의 이유로 순교를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차돈이 순교할 당시 일어난 기현상은 사실일까? 제작진의 조사 결과 땅이 흔들리고, 피 대신 우유가 솟구치고, 꽃비가 내리는 내용까지 이와 유사한 기적들을 여러 불교 경전의 유명한 성인들의 숭배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자료3>이에 대해 서울대 국사학과 남동신 교수는 “후대 신라 불교도들 입장에서 이차돈은 위인으로 간주되었고 이차돈을 영웅시하기 위해 불교 유명 성인들의 순교담을 끌어온 것”이라 설명했고, 제작진은 흰 우유가 솟고 꽃비가 내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 순교 전설, 고통과 죽음을 갈망케 하다
잘린 목에서 우유가 쏟아져 나온 순교 성인의 이야기는 가톨릭에도 있다. 중세 시대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영향을 끼친 성인전기이자 신앙서인「황금 전설(The Golden Legend, 1260년경)」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나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가 그러했다.
“그가 목 베인 자리에서는 한 줄기 우윳빛 액체가 흘러나와, 군인의 옷을 적셨고 그다음에 피가 솟아 나왔다. 하늘에서는 거대한 빛이 비추었고, 성인(바울)의 시신에서는 지극히 감미로운 향기가 풍겨 나왔다”
“성녀(카타리나)의 목을 자르니 피 대신 우유가 쏟아져나왔다.<자료4> 천사가 시신을 가져다 그곳으로부터 20일이 걸리는 곳인 시나이산으로 옮겼다. 기름이 그녀의 뼈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왔는데 사지가 약한 사람을 모두 정상적으로 고쳐
주었다.” – 야코부스著「황금 전설」中
이러한 순교 전설은 설교나 전례 의식 중에 낭독되었다. 교황 젤라시오 1세(재위:492~496년)는 미사 중 순교자를 기념하는 관습을 전파시켰고, 501년에 열린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제단 위나 아래에 성인이 남긴 성유물을 설치해야 한다고 정해졌으며, 이 결정은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순교자의 고난과 순교행위를 기억하기 위해 성인 축제도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축제는 순교자의 수난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순교 전설은 공공장소에서 낭독되거나 연극으로 꾸며지기도 했으며, 책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달되었다. 또 순교 장면을 그리거나, 조각하거나,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겨넣는 등 시각적인 예술 매체로도 전파되었다.<자료5> 순교 전설에 등장하는 감각적 은유와 생생한 그림은 신자들이 온몸으로 순교자가 당한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했고, 순교 전설을 들은 신자들은 순교자의 고통과 죽음을 기리고 그를 본받아 순교를 갈망하게 되었다.
「황금전설」을 보면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고통이 아닌 쾌락으로 여긴다.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느낀다. 고통을 가하려던 자들이 그들이 가하려고 했던 것보다 더 죽음과 고통을 열망하는 순교자들의 모습에 오히려 충격을 받는 내용들은 황금전설의 흔한 레퍼토리다. 이러한 성인들의 순교를 모범으로 삼았던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순교할 각오를 하고 있었고, 이런 태도 때문에 고대 로마의 사법 당국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태도가 괴상하고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왜 순교 전설을 만들고 퍼트리며 순교를 성스럽고 본받아야 할 행위로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것일까?
▣ 수치스러운 형벌을 성스러운 희생으로
예수가 살던 시대, 십자가형보다 더 수치스럽고 경멸을 받는 처형은 없었다. 알몸인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상처가 난 채로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고, 새들이 맨살을 쪼아 먹어도 무기력하게 일방적으로 당해야만 하는 형벌이었다.<자료6> 범죄자의 최후를 적나라하게 경고하여 범죄 억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형벌은 공개적으로 집행되었고, 범죄자들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불명예스럽게 처형된 자들의 썩은 살에서 나오는 악취는 너무나 역겨워서 사람들은 그 광경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오염되었다고 느꼈고, 십자가형에 관련된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으며, 그 말 자체도 역겨워했다.
이러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볼 때 불쾌하고 혐오스럽고 기괴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예수의 죽음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려 하면 움츠러들었으며, 신앙심이 깊은 자라도 예수의 죽음을 재현한 그림이나 형상을 보면 위축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십자가형을 폐지하고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신도들은 예수의 수치스러웠던 형벌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성스러운 희생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그들이 본받아야 할 ‘순교의 원형’으로 삼았고, 박해로 죽임당하는 것을 ‘예수를 본받아 죽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널리 알리고 성취한 순교’로 해석했다.<자료7> 그들은 결국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의 죽음을 성스럽고 본받아야 할 순교로 둔갑시키는데 성공했다.
신도들은 예수를 본받아 순교를 원했다. 순교 성인 동정녀
율랄리아의 성인 전기에도 그러한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다시안(박해자)은 결국 상처투성이가 된 율랄리아로 하여금 알몸으로 도시를 돌게 해 조롱거리로 만들고는 십자가에 묶어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율랄리아가 십자가에 묶였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섬기는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한없이 기뻤다. 그리고 십자가에 묶인 채 몇 번이고 믿음을 고백하며 신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처럼 나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피를 흘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온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을 내놓고 싶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보다 더 심하고 모진 고통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독일의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에머리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은총이라 표현하기까지 했다.
“나는 나를 죽여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느님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처럼 나 역시 절벽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는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천한 장소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든 심리 상태지만 교육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교육을 통해 순교를 영웅시하고 죽음을 마다않는 마음가짐을 갖추게 했다.
▣ 순교 교육으로 지배력을 강화하다
구약에서는 율법과 계명의 준수를 위해 순교의 개념이 사용되었다. 독일의 신학자 빌헬름 부세는 “유대 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임을 역설하며 마카베오 시대의 신앙인들의 열정에서 순교가 태동했다고 말했다. 마카베오기는 유대교에서 정경에 포함하진 않았지만 구약의 마지막 역사서로서, 마카베오라 불렸던 유다와 그 형제들이 신의 도움으로 이교도를 물리치고 유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되찾는 내용이다.<자료8> 유다 마카베오와 부하들이 신이 도와줄 것을 믿고 용기를 내어 율법과 조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 죽을 각오를 하는 등(마카베오 하기 8장 21절) 전체적으로 순교를 장려하고 영웅시하는 순교 신학이 담겨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역사를 실제 역사로 교육받아, 자신들이 ‘2천 년 유랑 속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학살에서도 끝내 살아남아 독립을 쟁취한 뛰어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믿음과 교육 덕분에 유대인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민족간 결속력을 다질 수 있었다.
이슬람교는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는 무장단체들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슬람 자살폭탄테러범의 심리적 범행동기에 관한 한 논문을 보면 자살폭탄테러 사건을 ‘순교적 자살 사건’이라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살테러공격의 역사를 보아도 이에 부합한다. 인류 최초의 자살테러공격은 성경에 기록된 유대인 영웅 삼손이 유대인과 적대적 관계이던 필리스타인의 재판관들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으며, 역사적 기록으로는 13세기, 이슬람을 침공한 십자군의 군함 자폭 공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자군은 이교도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음으로써, 최후의 심판날에 구원을 얻으리라 믿었다.
논문은 종교적 이념의 세뇌화와 순교적 생사관이 자살 공격의 본질적인 범죄심리로서 행동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자살폭탄테러공격자로 선정되면 수개월간 정보를 차단하고 외부와 격리하여 종교적 이념을 교육시켰는데, 이스라엘의 테러리즘 심리학자 아리엘 메라리는 이런 과정을 출구가 나올 때까지 중도에 이탈할 수 없는 터널에 비유하였고, 터널이라고 칭하는 이 심리적 조작과정을 통과하면 종교적 집단주의에 동화되고 자발적인 영웅주의적 테러심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순교 교육 덕분에 이슬람 무장단체는 수월하게 자살폭탄 대원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일본에서도 천황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는 교육이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제국 시대 전쟁에 참전했다 생존한 일본군의 인터뷰를 실은 책『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을 보면 일본이 군인들을 어떻게 목숨을 걸고 참전하게 했는지 알 수 있다. 생존자는 인터뷰 내내 거듭 ‘교육의 무서움’을 강조했다. “너희는 천황 폐하의 자식이니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식의 교육을 받는데, 이렇게 훈련되다 보면 나라를 위해 죽는 것만이 정말 소망이 되어버리고, 그 믿음을 머리 속에 담아두게 되니까 전혀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자살 특공대였던 가미카제 대원들에게는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는 말로 독려했다.<자료9> 야스쿠니에 간다는 말은 죽으면 신이 될 수 있으니 안심하고 죽으러 가라는 것이었고 그런 교육을 받았던 대원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과 같이 종교의 지배자들은 신도들을 순교할 각오로 무장하게 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수준의 최고의 충성심과 지배력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 순교로 천국을 보장받다
런던의 핀스베리파크 모스크 밖에서는 이슬람 프로파간다의 비디오를 팔았다. 가장 잘 팔리는 내용은 자살폭탄 테러범의 생애 마지막 순간들을 담아놓은 필름이다. 이 비디오 영상에 의하면 자살폭탄테러범의 마지막 순간의 모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천국의 문에 들어서는 환희에 찬 얼굴이었다. 이슬람에선 율법에 따라 순교시 천국을 보장받았고, 환희에 찬 얼굴은 종교적 순교 순간의 심리를 나타내는 것이며, 무슬림들이 이교도와의 전쟁에 서슴없이 목숨을 바치는 동기가 되는 것이었다.
가톨릭의「황금전설」에서도 순교의 순간, 환희를 느끼는
성인을 묘사하는 장면이 흔하게 등장한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가톨릭은 순교로 점철된 역사를 지녔다. 마르텡 모네스티에의「자살백과」에서는 “스스로 희생하는 것만이 자살이 아니다.” 라며 순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순교는 구원의 확신을 주고 천국을 보장해주는 행위였다. (…) 이미 어찌 될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죽음의 상황을 피하지 않는 것도 자살에 해당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 중 일부는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거나 죽음을 찾아서 일종의 자살을 실천했다. 그리스도교는 순교를 가장한 자살 위에 교회를 세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앙을 이유로 엄청난 고통과 학대를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받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성인의 반열에 놓고 숭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도교가 창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개념에 놀랐다. 삶의 목표를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닌 내세에 제시했다는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삶을 장애물로 여기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흥미를 거의 느끼지 못하게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 중 상당수가 쉽게 자살을 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 하에서 삶의 의미를 거의 느끼지 못했던 이 사람들이 천국이라는 낙원에 가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생을 마감해야겠다는 유혹에 빠져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초기 가톨릭교회는 진정한 행복, 영원한 영광은 이 세상의 삶 너머에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자살로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에 부응하고 있다. 영국 작가 알바레즈는 논문에서 순교는 로마인들의 박해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창조라고 말했다.”
– 마르텡 모네스티에의「자살백과」中
자살의 동기가 된 그들의 교리가 진리가 아니라면, 그들의 가르침은 ‘자살 유도’이며 ‘살인 중의 살인’일 것이다.
지난달 25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가 “전쟁에서 죽으면 모든 죄를 씻어준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고 있다.<자료10> 그는 지난달 21일에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광과 영생을 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21세기의 대중들은 1095년, 가톨릭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을 모집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신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했을 때 열렬히 환호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종교 지도자가 천국을 미끼 삼아 전쟁 지지 발언을 이어가자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 줄을 잇고 있으며, “키릴 총대주교를 최전방으로 보내 그의 죄를 씻게 해주자”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희대의 종교 사기극으로 평가받는 면죄부도 최소한 목숨을 요구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이 있을 때 더욱더 철저하게 기쁨에 넘쳐 악을 행한다.”고 얘기한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주장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사실임이 증명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독일의 철학자 프레드리히 니체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가장 무섭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진실을 알 생각이 없다.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라고 했다. 이성을 잃고 무비판적으로 믿는 것은 광신(狂信)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은 맹신(盲信)이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가히 숭고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증거 없는 그릇된 신념’이 아니라 ‘진실에 기반한 올바른 신념’이라야 그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