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21> 종말론으로 혹세무민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 세상의 운명은 얼마 전부터 쇠하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들이 있다.”
이것은 서기전 28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판에 새겨진 글이다. 세상에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는 것은 현대 사회만의 일이 아니었다. 종말론은 가장 역사가 오래된 학문 중 하나로, 서기전 고대부터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해왔다. 특히 현실이 극도의 불안이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현존하는 세계와 인간 및 만물이 미래 어느 시점에서 모두 멸망하게 된다’는 종말론의 주장은 더욱 힘을 얻었다.
지금까지 다양한 종말론들이 있었고, 어떤 종말론은 ‘내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는 말의 긍정적 효과처럼, 더 나은 삶의 태도로 이끄는 수단이 되었지만, 어떤 종말론은 두려움을 이용해 포교와 개종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여러 종교들의 종말론들을 소개하고, 일부 종말론이 낳은 혹세무민의 사건들에 대해 알아본다.
▣ 여러 종교들의 종말론
종말론은 동서고금에 걸쳐 존재해왔고, 문화와 문명마다 각자의 종말론을 믿는다. 사람들은 천문학 등 과학적 증거를 이용하거나, 선조로부터 내려온 예언을 믿거나, 선조들의 기록을 해석하거나, 직접 예언을 듣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각자의 종말론을 주장해왔다. 이 중 종교들에서 주장하는 종말론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본다.
‘세상이 말세다’라는 표현의 ‘말세’는 불교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죽은 후의 시대를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세 시대로 나누는데, 이때 말법의 시대가 말세인 것이다. 정법 시대는 부처의 가르침이 세상에 구현되는 불교에서 완벽한 세상, 상법 시대는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긴 하지만 세상에 구현되는 정도까진 아닌 세상, 말법 시대는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세상이다. 말세가 오면 세상이 혼탁해져 정치와 도덕과 풍속이 타락하고 악법만이 성행하며 정의가 사라진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쾌락을 좇고 성적으로 문란해지며 사회가 혼란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게 된다. 하지만 종말 때에는 미래의 또 다른 부처인 미륵보살이 와서 세상에 새롭게 불교를 세우고 무지와 증오와 세속의 고통이 없는 열반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세상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된다.
북유럽의 여러 신들을 믿었던 북유럽 문화권에서는 라그나로크라는 종말의 날을 믿었다. 북유럽의 전설에 의하면 혹독한 겨울이 3년간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서로 다투고 싸우며 일말의 도덕심까지 팽개친다. 늑대들이 태양과 달을 삼켜버려 온 세상은 암흑에 빠진다. 수탉 3마리가 울면서 신과 거인들을 부르고, 죽은 자들이 깨어난다. 엄청난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산들이 무너지고 바다에는 세찬 파도가 치고 해일이 일어난다. 위험을 감지한 빛의 신은 나팔을 불어 신들을 소집한다. 북유럽 최고신 오딘, 천둥의 신 토르, 오딘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천국의 영웅적인 신들이 황금 갑옷을 입고 아름다운 백마를 타고 전장에 도착한다.<사진1> 계속해서 모든 신들과 거인들과 악귀들이 죽음의 전투를 위해, 저주받은 노르웨이 광야에 도착한다. 격렬한 싸움으로 전투에 참여한 대부분이 죽었고, 온 세상이 불길에 휩싸여 아직 살아 있던 것마저 불에 타 죽고, 지구의 모든 땅은 바다에 가라앉는다. 그러나 세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두 명의 인간과 몇몇 신들이 있었다. 악이 사라지고, 아름답고 순수하게 정화된 새로운 세상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살아남은 이들은 평화로운 조화 속에 번창하며 행복하게 살게 된다. 죽었던 이들의 영혼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착하게 산 사람들은 신들과 함께 호화롭게 살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악몽과 같은 지하 감옥으로 추방된다.
다음은 이란(고대 페르시아)의 민족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이다. 서기전 600년경,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이자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자라투스트라는 종말과 최후에 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에 의하면 종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1,000번째 겨울이 끝나고 (…) 태양은 점점 볼 수 없게 되고 (…) 1년과 한달과 하루가 점점 짧아지고 (…) 땅은 메말라가고, 작물은 씨앗을 생산하지 않고 (…) 사람들은 점점 더 거짓말과 나쁜 짓을 한다.” 마지막으로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이 있을 것이다. 선이 승리하고 하느님은 무쇠와 신성한 불로 세상을 정화한다.(조로아스터교에서 불은 그리스도교의 십자가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사진2> 그리고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영혼의 심판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동정적인 신이므로 죄인이라도 영원히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3일 후 용서를 받고 부활할 것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정화하면 모든 고통이 끝나고 세상은 완벽해진다.
힌두교는 서기전 3,000년에서 2,000년 사이 고대 인도 북부에서 발생해, 서기전 1,500년에 주요 경전인 베다를 정립한 인도의 민족 종교이자 최대 종교다. 힌두교 역시 종말론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모든 것은 무가 되었다가 다시 유로 태어나는 순환을 되풀이한다고 믿는다. 힌두교의 최고신에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가 있는데, 브라흐마가 세상을 창조하고 비슈누가 세상을 관리하며 시바가 세상을 파괴하면, 브라흐마가 처음부터 다시 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한 주기는 42만 7,000년이며 한 주기에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시대에서 완전히 타락한 시대까지 네 시대가 있다. 가장 타락한 네 번째 시대는 칼리 시대로, 문명의 정신적인 쇠퇴, 폭력, 역병, 자연재해로 점철되다 인류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칼리 시대에서 악과 혼돈이 한계에 달하면 비슈누가 백마를 타고 칼을 든 영웅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모든 악을 멸해 새로운 세계를 쌓아 올린다고 한다.<사진3>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이자 아브라함계 종교의 뿌리인 유대교에도 종말론이 있다. 유대교에 따르면 종말 때에는 전 세계의 유대인 망명자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이스라엘은 북쪽 이방인들과 아마겟돈이라는 전쟁을 한다. 이 전쟁에서 죽은 자들을 묻는 데만 7개월이 걸릴 것이다.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 이스라엘의 적들이 모두 멸망한다. 신이 내려준 메시아가 올 것이며 그의 지휘하에 새로운 7번째 천 년을 시작할 것이다. 그 메시아는 다윗 왕의 후손일 것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올 것이고, 신실한 유대교 신자일 것이며, 악과 폭정은 그의 존재로 인해 소멸하고, 전쟁과 굶주림, 고통, 죽음이 사라질 것이다. 그가 모든 문화와 국가를 포용하고 전 세계가 하느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많은 종말론들이 있었지만, 가장 많은 종말론을 파생시켰으며, 현존하는 종말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유대교의 이단인 그리스도교에서 비롯되었다.
▣ 그리스도교의 종말론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그들의 경전인 성경에서 근거한다. 성경에는 종말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모두 세상에 종말이 찾아오리라 예언했다.
누가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그날이 올 것’이라며 경고했다.
“그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볼 것이다. (…)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그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그날이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 누가복음 21장 25~35절 (공동번역 성경)
신약 성경의 절반을 저술한 그리스도교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그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쓴 서한의 일부이다.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공동번역 성경)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임한다는 예수 재림의 날, 신도들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예수를 만난다는 이 장면을 그리스도교에서는 ‘휴거’라 부른다.<사진4>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직도 휴거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이자 초대 로마 교황인 베드로도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 (베드로전서 4장 7절)” 선언했다. 또한 그날에는 신천지(新天地)가 나타날 것이니 그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한다고도 했다.
“하느님의 심판날을 기다릴 뿐 아니라 그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타 없어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베드로후서 3장 12~13절 (공동번역 성경)
예수의 사도 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이 분명하다(요한1서 2장 18절)” 했으며, 성경에서 종말에 대해 가장 자세히 서술했다는 계시록을 썼다. 예수 사후 60년경 저술한 요한 계시록(=요한 묵시록)이다. 요한 계시록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이며 유일한 예언서다.<참고자료1: 요한 계시록은 왜 해석이 필요할까?> 그는 신이 보여주는 환상의 형태로 계시를 보았다.
“신이 보낸 천사가 요한에게 나타난다. 목소리가 명한다. “이리 오너라. 네게 미래를 보여주겠다.” 신은 미래가 기록된 한 개의 두루마리 문서를 준다. 문서는 일곱 봉인으로 봉해져 있었다. 차례로 네 봉인을 떼자 말을 탄 네 기사가 나타난다. 기사들은 각각 적그리스도, 전쟁, 기아, 질병과 죽음을 가져온다. 다섯 번째 봉인을 떼자 순교자들이 되살아났고,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자 해는 검게 변하고 달은 핏빛으로 변하며 지진으로 도시들이 파괴된다.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고 요한은 나팔을 든 천사들을 본다. 나팔이 울릴 때마다 끔찍한 재앙이 시작된다. 우박, 비, 피가 비 오듯 땅에 떨어진다. 숲은 파괴되고 바다는 피로 넘쳐난다. 이마에 신의 표지가 없는 자들은 무서운 메뚜기 떼에 습격당한다. 2억 명의 말 탄 전사들이 인류의 3분의 1을 살육한다. 악마의 화신인 무서운 짐승이 나타난다. 아마겟돈이라는 곳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예수와 하늘의 군대가 흰 말을 타고 내려온다.<사진5> 예수는 사탄을 물리쳐 불의 호수에 던진다. 예수는 그 후로 천년을 다스리며 사탄을 파멸시키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고, 새 예루살렘이 천국에서 내려온다.”
요약하면 대환란이 일어나고, 아마겟돈에서 선과 악의 전쟁이 일어나고, 예수가 악한 세력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내용이다.
성경에서 언급한 종말의 내용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 여러 종말론을 낳았다. 예를 들어, 재림한 예수가 천년을 다스린다는 요한 계시록을 근거로,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 2세(999~1003년 재위)<사진6>와 많은 성직자들은 예수의 통치가 끝나는 1000년 1월 1일에 종말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999년 12월 31일 밤,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지상에서의 최후 미사」를 보기도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년~1216년 재위)<사진7>는 이슬람교의 성립일에 666년을 더한 1284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선언했다. 666은 요한 계시록에서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였고, 십자군 전쟁 중이었던 당시, 그리스도교의 적은 이슬람이었기 때문이다.
▣ 종말론이 낳은 혹세무민의 사건들
무수했던 종말론들은 종말로 인한 두려움으로 삶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는가 하면, 현세를 포기하고 광신행위를 일삼거나 폭도를 일으키거나 자살하는 이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다.
2세기, 그리스도교의 몬타누스파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가 돌아올 것이며 새로운 예루살렘이 천국으로부터 내려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에 로마의 한 지도자는 세상의 종말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신자들과 함께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했다.
러시아의 한 그리스도교 종파는 1669년 종말이 온다고 믿어, 적그리스도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 1669년~1690년 사이 2만 명에 가까운 신자들이 분신자살을 택했고, 어떤 종파는 1900년 11월 13일이 최후의 심판일이라 믿어 100명이 넘는 신도들이 그날 동반자살하기도 했다.
1095년, 광기 어린 살육이 자행됐던 십자군 전쟁도 종말론적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말세에는 천상의 예루살렘이 지상의 예루살렘 바로 그 자리에 내려오게 되어있었고, 이 성지에서 죽는 것은 최후의 심판 날에 예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는 교황이 십자군 전쟁으로 성지 출입의 자유를 되찾으려는 목적의 하나였다. 1099년, 십자군은 그들의 바람대로 예루살렘을 함락했고, 학살이 끝나자 그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말린 뒤 그리스도의 성묘를 향해 가서 찬양의 기도를 올렸다. 십자군의 종말론적 성격은 십자군이 와해와 패주를 반복함에 따라 서서히 강렬해졌고, 최후까지 종말론적 성격을 유지했다. 1212년 발생한 소년 십자군에게 어디에 가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신에게로”라고 대답했다. 순교한 자들은 종말의 날에 다시 살아나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종말론적 믿음은 십자군의 자발적 참여에 큰 동기가 되었다.
1492년, 동양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려 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대로 신천지를 찾을 임무가 내게 있다’고 말한 바 있다.<사진8> 콜럼버스는 종말론적 태도에 깊이 침윤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예수의 전달자라 생각했고, 그가 발견한 땅으로부터 시작하여 전 인류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종교의 적에게는 십자군을 보내 격퇴함으로써 새 시대가 열리도록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있었다. 그것이 예수의 재림을 앞당기는 길이라 믿은 것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사실 원주민 대륙 침략이었고, 원주민 학살과 강제 개종, 노예 무역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종말을 기다리거나 앞당기려는 일련의 사건들은 현대에도 계속 일어났으며, 지금도 어떤 이들은 예수의 재림과 휴거, 새 예루살렘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종말의 날에 자신들이 무조건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구약의 예언자 요엘의 예언과 요엘의 예언을 인용한 사도행전을 보면, 종말의 날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란 내용이 있다.
“내가 하늘과 땅에 이상한 징조를 보여줄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연기이다. 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요엘 2장 30~32절, 사도행전 2장 19~21절
그리고 예수에게 처음 세례해준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가복음 1장 15절)”라고 설교한 바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소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짧은 표어로 요약된다. 그들에게 종말을 대비하는 것이란 곧 예수를 믿는 것이었다. 이 믿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십자군은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회개를 명령했으며, 불복하는 자들에겐 생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흘 동안 3만 명을 살육하기도 했는데, 당시 십자군에 참여했던 레이먼드는 그 살육의 현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람들은 무릎과 고삐까지 차는 핏물 속에서 말을 달렸다. 사실 이 장소(예루살렘)가 불신자들의 피로 가득 찬 것은 하느님의 정의롭고 훌륭한 심판이었다.”라고 서술했다. 그리스도교의 믿음대로라면, 종말의 날, 그 십자군들은 모두 천국에서 만날 것이다.
계속되는 기상이변과 전염병, 전쟁의 위협 속에 있는 오늘날, 종말론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일 수 있다. 어떤 종말론이 혹세무민하는가?
<참고자료>
요한 계시록은 왜 해석이 필요할까?
요한 계시록은 분명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들로 가득해, 성경 가운데 해석이 가장 어렵고 다양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로 여러 가설들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 요한 정신 이상설
요한 계시록이 쓰여진 대는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극도로 탄압하던 시대로, 심리학자 폴 와츠키는 요한의 정신 상태를 이유로 꼽았다. 폴 와츠키는 “그는 늘 도망자 생활을 했습니다. 만약 잡히면 추방당하거나 고문과 사형을 당했으니까요. 요한의 시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곧 재림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들의 살아생전에 재림하여 폭정을 끝내주리라 믿었죠. 하지만 예수는 돌아오지 않았고 요한은 추방을 당하고 맙니다. 요한 계시록의 내용으로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어요. 아마도 자신의 환상을 현실과 혼동했을 겁니다. 정신분열증과 유사한 정신병을 앓은 듯 보입니다. 간혹 문학적 재능을 보이기도 해요. 계시록도 그래서 쓰여졌겠죠” 라고 설명했다.
■ 필사, 번역, 편집 과정 오류설
요한 계시록을 포함해, 성경은 원문이 존재하지 않고 사본으로써 전해졌다. 예수가 활동했던 1세기와 가까운 시기에 필사된 사본일 수록 신뢰도가 높아지는데, 1세기에 기록된 요한묵시록의 사본은 전무하다. 전해 들었던 것을 기억해내어 기록한 것이며, 그마저도 2~8세기 사이에 쓰인 그리스어 사본을 번역한 것이다. 이후에도 대대적으로 편집되고, 다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변형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로마에 대한 항거설
요한은 로마의 그리스도교 박해와 부당하고 폭력적인 자신의 상황에 분노했다. 로마를 저주하는 예언을 쓰고 싶었지만, 모반은 사형이었던 시대이기에, 그리스도교인들만 알아들을 말을 써서 암호처럼 적은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계시록에서 심판당하는 요한의 적이 로마 제국과 황제 네로임을 암시하는 증거들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짐승의 숫자 666이다. 당시, 히브리어 알파벳을 각각 숫자로 표기하는 수비학은 암호로 쓰였는데, 666을 풀이하면 로마 황제 네로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