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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과 기획

세계 종교 탐구 <17> 죽고 부활하는 신에 대하여

BY.천부교

<자료1>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풍습이었던 부활절 달걀
달걀은 고대에서부터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여 다양한 신앙과 예술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색을 칠한 달걀을 맨 처음 사용한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매년 춘분(春分)에 색을 칠한 달걀을 주고 받으며 축하했다. 이집트인들은 신전에 태양신 라의 부활을 상징하는 황금색으로 염색한 계란을 바쳤고, 중국에서도 종교 축제 때 염색하거나 색칠한 달걀을 사용했다. 부활절의 영문명 ‘이스터(Easter)’는 앵글로-색슨족의 봄과 다산의 여신인 이스터(Eostre)에서 유래되었다. 4월은 원래 이 여신에게 바치는 달로 달걀을 먹거나 땅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출처: time.com/4732984/)

인간은 한번 죽고 나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하지만 신은 죽고 나서 부활하기도 한다. 그런 신을 믿는 종교들은 주기적으로 신의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을 치른다. 지난 4월 17일에는 그리스도교에서 그들이 믿는 신인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있었다.<참고자료1: 매년 달라지는 부활절 날짜> 부활절 전후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는데, 대표적으로 달걀 나누기, 세족식, 예수 고난 재현, 십자가 행진, 부활절 예배 및 미사가 있다.<자료1,2,3>

<자료2,3> 십자가 행진과 예수 고난 재현 모습
예수상을 들고 행렬하고 있는 스페인 군단과 서울에서 한 신자가 예수의 고난을 재현하는 공연을 하는 모습 (출처: http://archive.boston.com/bigpicture/2012/04/easter_and_holy_week.html)

부활절에만 부활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일요일을 주일(主日)로서 지키는 이유도 예수가 일요일에 부활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절반을 저술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있게 한 인물이라 평가되는 바울은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자료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 고린도전서 15장 14~15절

부활하는 신을 믿는 종교는 그리스도교 이전에도 다수 존재했다. 다른 종교들에서는 신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여러 종교의 죽고 부활하는 신에 대해 알아본다.

<자료4> 예수의 부활을 강조한 바울
바울은 신약 성경의 절반을 저술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있게 한 인물이라 평가되는 그리스도교의 사도다. 그는 고린도 지역 신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출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 고대 수메르의 부활하는 신

<자료5> 이난나의 저승 여행 점토판
이난나의 저승 여행에는 수메르의 신들이 부활하는 내용이 있다. 저승에서 3일간 나무못에 매달려 있다 부활하는 수메르의 여신,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목자의 신과 포도주의 신이 나온다. (출처: 영국 국립 박물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은 누구나 죽으면 지하세계로 내려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하세계로 내려간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했는데, 서기전 2100년경 수메르 시대에 기록된『이난나의 저승 여행』이라는 문헌을 보면 저승에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신들에 대한 내용이 있다.<자료5>

하늘의 여주 이난나는 어느 날 저승에 내려가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저승에 간 이난나는 일곱 대문을 지나며, 각 대문을 지날 때마다 몸에 걸친 것을 빼앗겨 벌거숭이가 된 채 저승의 여주 앞에 끌려온다. 저승의 여주가 일어나자 이난나는 재빨리 그 옥좌에 앉았고 이를 지켜보던 큰 신들은 그녀를 저주한다. 이난나는 두들겨 맞아 고깃덩어리처럼 변한 채 나무못에 매달려있는 신세가 된다. 3일 동안 이난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시종은 지상의 큰 신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이난나는 구원의 신 엔키가 준 생명초와 생명수로 다시 일어나 지상으로 올라간다.

저승사자들은 이난나를 대신할 사람을 데려가야 한다며 그녀를 따라왔다. 이난나는 석류나무 밑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즐겁게 걸터앉아 있던 그녀의 남편, 목자의 신 두무지를 보자 덜컥 화가 났고 그를 저승으로 보내라고 한다. 두무지는 도망쳐 그의 누이, 포도주 여신 게쉬티난나의 양조장에 숨었으나 결국 붙잡히게 된다. 이난나는 두무지와 그를 숨겨준 게쉬티난나가 각각 반년씩 번갈아 이승과 저승을 오가도록 명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금성의 신 이난나의 부활은 금성이 지고 떠오르는 모습을 의미하고, 목자의 신 두무지와 포도주의 신 게쉬티난나의 죽음과 부활은 계절의 순환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덥고 건조한 여름을 초목과 목자의 신 두무지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라 믿었다. 여름 한 달 동안은 그를 애도하는 의식을 가졌고, 매해 봄에는 수태 준비를 마친 대지에 씨를 뿌린 뒤 두무지의 부활제를 올렸다. 3~4월 사이에는 두무지의 죽음을 재현하는 연극을 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기리는 제의를 했다. 이때 애가(哀歌)를 부르며 죽은 두무지를 향해 사막으로 나가는 행렬을 지었다고 한다.

수메르의 부활하는 신들 이야기에서, 저승에 붙잡혀 두들겨 맞아 나무못에 매달려 있다가 3일 만에 다시 부활했다는 주제, 또 목자나 포도주의 신이 부활한다는 주제는 부활하는 신을 믿는 후대의 종교에서도 자주 관찰된다. 또 그러한 종교에는 신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도 항상 동반하여 존재했다.

▣ 고대 이집트의 부활하는 신

고대 이집트에도 부활하는 신이 있었다. 농업, 곡물, 초목, 부활의 신 오시리스다. 다음은 이집트 토착 문헌들과 그리스 저술가들의 기록을 종합한 오시리스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다.<자료6,7>

오시리스가 태어났을 때에 ‘만물의 주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선언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시리스는 대지의 왕으로서 이집트를 통치할 때 이집트인을 야만 상태에서 교화하여 율법을 가르쳤고 신들을 숭배하게 했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밀과 보리가 야생하는 것을 발견했고, 오시리스는 그 곡식의 재배법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오시리스는 또한 최초로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로 술을 빚는 법도 가르쳤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를 칭송하고 신으로서 섬겼다. 그러나 그를 질투한 동생 세트는 형을 죽인 뒤 시신을 14조각으로 잘라 나라 곳곳에 버렸다. 아내 이시스는 나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오시리스의 흩어진 시신을 모두 찾았고, 신들의 도움으로 오시리스는 곧 부활했다. 농업, 곡물의 신 오시리스의 부활로 세계의 풍요가 회복되는 한편, 오시리스는 저승의 왕이 되어 죽은 자를 심판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자료6> 오시리스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는 샤바카 스톤(왼쪽사진)
(출처: 영국 국립 박물관)
<자료7> 부활한 오시리스, 덴데라 신전의 부조
오시리스가 부활해 아내 이시스의 날개 사이에 서있다. 한 남자가 손잡이가 있는 십자가 문양(𐀼(앙크):이집트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번역되는 이집트 상형문자)을 오시리스에게 들이대고 있다.
(출처: https://www.marsaalamtours.org/)

그의 부활은 해마다 기념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서『역사』에 따르면,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삼각주의 모래톱에서 매해 대규모 축제를 열어 수만 명의 남녀가 보는 가운데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연극을 공연했다. 또 신관들은 오시리스 조각상을 배에 싣고 행진했고 그 뒤로 순례 행렬이 뒤따랐다. 헤로도토스는 오시리스의 축제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와도 동일하다며, 그 유사성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판단하면서 고대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그 축제가 소개되었다고 얘기한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의 포도주의 신으로, 로마에선 바쿠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디오니소스도 오시리스와 같이 몸이 찢긴 채 살해당했으며, 곡물과 포도 재배법을 가르쳐주는 신이었다.

아기 디오니소스는 동굴에서 자라다가 거인들에게 사로잡혀 온몸이 찢기는 불행을 당한다. 하지만 대지의 신 레아의 도움으로 찢긴 몸을 회복하고 부활한다. 이후 디오니소스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황홀경에 이르는 법과 포도와 곡물 재배법을 가르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등 기적을 행했다.<자료8> 결국 디오니소스는 신으로 인정받아 올림포스 산에 사는 열두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자료8> 포도주를 만드는 디오니소스가 그려진 그리스 항아리
디오니소스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자료9> 디오니소스의 수난을 묘사한 부적을 석고로 뜬 것
십자가에 못 박힌 디오니소스를 묘사한 반지 도장 부적.
“오르페우스가 바쿠스(=디오니소스)가 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출처: 티모시 프리크外,『예수는 신화다』, 동아일보사, 2002.)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는 앞서 소개한 오시리스의 축제와 닮았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디오니소스의 나무 신상을 든 신관들의 행렬로 시작하여 빵과 기타 봉헌물, 물과 포도주 단지를 든 사람들이 뒤따랐다. 행렬 후에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모방하는 합창과 연극을 했다. 대중적 축제가 열리고 있는 동안 소수의 엘리트 계층은 밀실에서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종교 집회를 가지며 디오니소스의 수난극을 재현했고,
<자료9> 그럼으로써 상징적인 영생을 추구했다.

그리스와 로마 지역에는 디오니소스 외에도 두무지와 동일시되는 아도니스, 식물 신이자 죽음과 부활의 신 아티스, 태양신 미트라 등과 같이 죽음을 겪고 다시 부활하는 신들이 많았다. 아도니스는 메소포타미아의 두무지처럼 절반은 지하세계에서 절반은 지상에서 살게 된 신으로, 매년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부활을 축하하는 축제가 거행됐다. 사람들은 구슬픈 피리 소리에 맞추어 통곡하고 가슴을 치면서 아도니스의 죽음을 애도했고, 다음날 그가 다시 살아나서 숭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른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아티스와 미트라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나 3일 뒤 부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신들은 그리스도교 이전 고대부터 존재했던 신이지만, 그리스도교가 교세를 확장하던 동시대에도 부활하는 신은 다수 존재했다.

▣ 로마 제국 시대의 부활하는 신

<자료10> 아폴로니우스의 동상(왼쪽)
아폴로니우스의 제자들은 그가 죽은 뒤 부활하여
승천한 것을 보았다고 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자료11> 아우구스투스의 신전 (출처: 위키미디어)

2010년 미국의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는 예수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경쟁자들에 대해 방영하였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재현하는 논픽션 기록으로 전문가의 검증을 거쳐 사전에 많은 조사가 이루어진 후에 제작된다. 이 기록과 외신 기사들에 의하면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서기전 27년 이후, 제국 안에 여러 나라가 뒤섞이며 여러 종교와 신들이 경쟁했고, 예언자와 메시아, 동정녀 몸에서 태어났다는 신의 아들들이 많았다. 죽음에서 부활한 신들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은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에 아주 흔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선지자들이 각지에 등장했는데, 그중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라는 인물도 있었다.<자료10>

아폴로니우스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했고, 제자를 모으고 평화와 사랑을 설파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에 의해 고발당해 처형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후, 몇몇 추종자들은 그가 자신들 앞에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를 만지기도 했으며 그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도 신으로서 숭배받았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평화를 주는 자, 만물의 주 아우구스투스로 불렸다. 그의 통치 아래 로마의 평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의 양아버지 카이사르는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주장이 있었고,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그가 신들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믿음과 더불어 그의 신전이 생겨났다.<자료11> 당대에 존경받는 이들은 신격으로 추대받았고, 그들이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주장이 일반적인 시대였다.

▣ 부활하는 신이 왜 이렇게 많은가?

학자들은 고대 시대에 서로 유사한 부활 신과 부활 의식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다고 말한다. 고대의 사람들은 자연 현상이나, 천체의 이동, 계절의 순환 등을 신들의 결혼이나 죽음, 부활에 의한 것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부활은 종교에서 흔한 주제였으며, 종교적인 연극이나 주술도 그러한 주제를 다루었던 것이다. 앞선 종교의 성공 사례를 변형 및 발전시킨 후발 종교에서도 자신들의 신이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교만이 신성하고 유일무이하며, 이교 신앙은 원시적이고 악마적인 활동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고, 이교 신앙이 그리스도교와 동일한 전통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풍자가인 켈수스는 이에 대해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 공통된 특이한 사건들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어떻게 유일무이한 사건인가? 무슨 근거로 자신들의 믿음에 특수성을 부여하는가? 사실 그리스도교인들이 믿는 것에는 특수한 것이 전혀 없다.”

이에 대해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특수성을 증명하기 보다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사악한 악령들이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자들을 미리 만들어 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이, 시인들의 말과 마찬가지로 단지 경이로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인간들에게 미리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와 당대 최대 경쟁 종교였던 미트라교의 성사(聖事)가 동일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진실을 곡해하는 것을 일삼는 악마는 성사의 정확한 전말을 흉내낸다. 악마는 신도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수로 인해 죄가 용서된다고 약속하며, 신도들을 미트라스 의식에 입문시킨다. 그래서 악마는 성찬 봉헌식을 행하며 부활의 상징을 끌어들인다. 그러니 우리는 신성한 것들을 흉내내는 악마의 간교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313년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392년 이교를 금지시키면서, 그리스도교 이전 로마에 성행했던 기존 종교들은 그리스도교를 모방하는 악마의 종교이자, 신화에 불과한 죽은 종교로 전락당했다. 그리고 현재 그리스도교는 부활신을 믿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가 되었다.

▣ 그리스도교의 부활론에 대한 여러 연구들

<자료12> 예수의 후손으로 지목된 플랑타르와 그의 아들
(출처: popularculture.it/mostra_seconda_sala.htm)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예수는 십자가 형틀에 못박혀 사망했다 3일 만에 부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21세기에 들어 과학적, 고고학적 증거들이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이에 대해 새롭고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며 관련 서적,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속속 출간 및 방영되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종교학부 바트 D. 어만 교수의 저서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에서 ‘인간 예수를 신으로 보는 믿음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역사적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심지어 유대인들까지도, 현재 우리처럼 신이냐 인간이냐를 흑백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고, 위대한 인물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라는 인물을 신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그가 부활했다고 믿었다. 부활했다고는 했지만 더 이상 자신들과 함께 있지 않자 그가 하늘로 올라갔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예수는 신의 아들로 격상되고 그 결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1982년 영국에서 출간된『성혈과 성배』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해 자식들을 두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고 프랑스로 도망가 현재 그의 후손도 살아있다는 것을 소개해 그리스도교계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마이클 베이전트 外,『성혈과 성배』, 행림출판, 1982., p.342 ~352,393~428.)<자료12> 교계 지도자들은 이 저서가 예수의 거룩한 보혈을 모독한 것이라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 저자들을 비롯해 예수 부활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전통 입장에 반하는 증거들을 밝혔던 여러 학자와 방송사들은, 대중들이 2천 년간 진실로 알고 있던 내용을 공식적으로 반증하기 위해 여러 문헌과 사료들, 과학적, 고고학적 증거들을 참고하여 철저한 고증을 거친 연구 결과로서 이를 발표한 것이었다.

지난 14일에는 예수의 죽음을 믿는 영국의 한 의사 출신 신부가 자신이 예수의 사인(死因)을 의학적으로 밝혔다며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예수의 시체를 감쌌던 천이라는 수의에서 시체 자국을 분석해, 예수가 어깨 탈구에 의한 동맥 파열로 내부 출혈이 심해져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사용한 수의는 1988년 영국 국립 박물관과 영국 옥스퍼드대학 등에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진행한 결과, 예수 사후 1300년 후인 13∼14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드러나 조작으로 판명된 수의였다.<자료13> 1354년 발견된 이 수의는 발견 당시 예수 부활의 구체적 증거라며 그리스도교계의 큰 기대를 모았으나, 연대 측정, 재료 역사학적 분석, 혈흔 분석, 꽃가루 분석 등 여러 분석에 의한 교차 검증을 통해, 조작한 사실이 과학적 사실로서 입증되었다.

<자료13> 토리노 수의의 제작 연대를 밝히는 기자회견 장면
1988년 영국 국립 박물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토리노 수의의
제작 연대가 예수 사후 약 1300년 후인 1260~1390년임을 밝혔다.
영국 옥스포드, 스위스 취리히, 미국 애리조나 연구소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모두 유사한 결과값을 보이며
토리노 수의가 중세 시대에 조작된 가품이라 결론지었다.
(출처: https://www.acistampa.com/)


<자료14> 토리노 수의를 만지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
가톨릭에서는 이 수의가 예수의 시체를 감쌌던 천이라 믿으며, 성물로서 토리노 성당에 귀하게 보관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가 창궐하자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겠다며 이 수의를 공개한 바 있다. (출처: 바티칸 뉴스)

이 조작 논란에 대해 수의를 보관하고 있는 토리노 성당의 대주교는 ‘머리보다 마음으로 수의를 보라’고 조언하며,
‘수의는 진위에 상관없이 중요한 믿음의 수단이 된다’는 변명으로 둘러댔다. 지금도 이 수의는 성물로서 그리스도교에서 귀하게 보관하고 있다.<자료14>

부활절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절기이자 최대 명절이다. 부활절 당일 하루만이 아니라 70일 전 일요일부터 칠순절, 60일 전 일요일은 육순절, 50일 전 일요일은 오순절, 40일 전 일요일은 사순절이라 하며 5주 전, 4주 전, 3주 전, 2주 전, 1주 전 모두 다른 명칭으로 부르며 기념한다. 부활절 전 일주일은 고난 주간으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간 고난을 기념하는 기간이다. 이에 지난 15일,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도 국가에서 예수의 수난을 재현하는 행사와 행렬이 이어졌다. 로마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날 낮에 바티칸 베드로 성당에서 성금요일 전례를 진행했고<자료15>, 밤에는 로마 콜로세움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행사인 ‘십자가의 길’ 예식을 주재했다.<자료16> 예수의 부활을 잊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력과 정성이 엿보인다. 과학이 발달하고 진실이 드러날수록 이들은 더욱 필사적으로 부활을 기념할 것이다.

<자료15> 예수 허벅지에 입맞추는 프란치스코
부활절 전 금요일 전례에서, 십자가를 경배하는 예식을 하는 중이다. (출처: CNA)
<자료16>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에서 열린 ‘십자가의 길’ 행사
부활절 전 금요일 밤,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에서 ‘십자가의 길’ 예식이 코로나19 창궐 이후 3년 만에 진행됐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행사이다. (출처: catholicsun)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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