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 생존자
지금부터 17년 전, 9·11 테러가 일어난 날이었다. 미국 보스턴의 버나드 로 추기경은 국민을 위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3,000여 명이 희생된 엄청난 테러로 고통과 슬픔에 빠진 국민을 위로하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이듬해 보스턴 교구의 사제들이 수십 년간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을 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1,000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추기경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최근 교황의 수석 보좌관이 9·11 테러를 언급했다. 가톨릭이 끔찍한 테러를 당했다는 것이다. 테러범으로 지목된 것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배심이었다. 지난 8월 대배심은 면밀한 조사 끝에 1,000건이 넘는 가톨릭의 성범죄를 밝혀냈다. 특히 성범죄 신부의 신상명세를 만천하에 공개해 범죄를 더 이상 숨기지 못하게 했다. 이런 대배심 보고서를 두고 테러 운운하다니 적반하장도 끝이 없다. 또 독일에서는 가톨릭 사제들이 70년간 3,700건이 넘는 성학대를 저지른 것이 밝혀졌다. 그중 1,800명이 넘는 피해자가 열세 살도 안 된 어린이였다. 이 많은 어린이를 성적으로 학대한 것은 어떤 극악무도한 테러범도 하지 못한 일이다.
9·11 테러 17주기를 맞아 미국에서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테러 생존자를 격려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미국에서는 테러와 마찬가지로 아동 성학대를 겪은 사람도 ‘생존자(survivor)’라 한다. 영혼을 파괴하는 범죄를 당하고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가톨릭에게 성범죄를 당한 사람이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을 기록하는 것을 보면 이제 성범죄 생존자를 격려하는 시간도 필요할 듯하다. 어린 시절 거룩한 집이라 믿었던 성당에서 극악한 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고통은 가늠하기 어렵다. 그 고통에 끝내 스러져간 숱한 영혼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