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22> 진실한 역사를 찾아서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대일본제국이 미개한 조선을 통치하여 근대화로 이끌었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였다.” 진실을 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천인공노할 망언이 따로 없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자신들의 만행을 정당화하려는 전형적인 역사 왜곡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이런 역사 교육을 받은 일본인들은 이를 사실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도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잘못된 역사를 배워 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사는 태생적으로 왜곡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모든 사실’로 정의되지만 실지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역사는 유물과 유적, 기록 등의 사료(史料)를 토대로 역사가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료가 부족하거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과 해석하는 사람들의 사관(史觀)이 편향적이라면 역사는 쉽게 왜곡된다. 사람들은 개인이나 단체, 국가, 민족, 종교 등에 따라 저마다의 사관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사관에 따라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록하기도, 같은 사료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사관에 맞춰 역사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기도 한다.
역사학은 그 한계와 왜곡을 하나씩 닦고 벗겨내면서 진실에 가까이 가는 학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고 새로운 논리가 더 강해지면 역사는 진실을 향해 끊임없이 수정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적인 은폐와 조작이나, 근대에 들어 고고학과 과학적 분석·감정기법 등이 발달함에 따라, 객관적 증거 앞에 많은 역사 조작 사건들이 발각되었다.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들통난 역사 조작 사건들’의 예시를 몇 가지 알아보며 역사적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 보도록 한다.
▣ 비뚤어진 애국심,「수메르 왕명록」
1906년, 수메르 시대 왕들의 이름과 통치 기간이 빼곡히 적힌 점토판의 존재가 세상에 발표되었다. 일명 ‘수메르 왕명록’이었다.<사진1> 이후에도 왕명록에 기록된 왕들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다른 증거물들이 쉼 없이 출토되었고, 수메르 왕명록은 역사적으로 인정받아 수메르를 세계 역사의 맨 앞자리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이 왕명록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다른 기록에서 분명히 존재했던 라가쉬와 움마 왕조에 대한 기록이 모두 누락되어 있던 것이다.
수메르의 여러 사료들에 의하면 당시 라가쉬는 수메르의 최대 국가이자 최초의 통일 제국이었다. 움마는 라가쉬와 대립하던 이웃 국가였는데, 이들 역사의 중심에는 ‘에덴 쟁탈전’이 있었다.<사진2> 수메르에는 에덴이라는 비옥한 들판이 있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 수많은 물길로 연결된 에덴은 유용한 식수이자 수로였고, 가축과 곡식을 기르기 좋은 금싸라기 같은 땅이었다. 에덴을 차지하는 것은 도시의 풍요를 보장하는 지름길이었고, 이에 에덴의 길목인 ‘구에덴나’에서는 숱한 전쟁이 일어났다. 서기전 2600년 시작된 전쟁은 2334년 움마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는데, 라가쉬의 필경사들은 전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기록해 놓았다. 에덴을 중심으로 한 라가쉬-움마의 전쟁사는 생생한 수메르의 역사였다.
그러나 수메르 왕명록에서는 왕 몇 명의 누락 정도가 아니라, 라가쉬 왕조를 통째로 지워버렸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 가장 큰 나라였던 고구려의 역사를 지운 것과 같았다. 이 대담한 조작을 벌인 이들은 누구며,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30여 년 동안 수메르의 신화 · 역사 · 문명 연구에 전념했던『최초의 역사 수메르』의 저자는 이 역사 왜곡의 진범은 ‘악카드인’이라고 밝혔다. 수메르 문명은 수메르인이 세운 문명이다. 하지만 중간에 이민족(異民族)이 정복하여 통치하던 시기들도 있었다. 역사 조작의 시작은 악카드인인 사르곤 왕이 세운 악카드 왕조 때였다. 수메르를 차지한 악카드의 역사가들은 ‘역사 다시 쓰기’에 나섰다. 마치 일제가 조선사 편수회(朝鮮史 編修會)를 만들어 조선의 역사를 식민 통치에 적합한 역사로 개조하려던 것과 같았다. 자신들은 침략국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정통성과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하려 한 것이다. 그들은 수메르 왕조의 시작을 사르곤 왕의 근거지였던 키쉬 왕조로 정했다. 서기전 2073년~2046년, 악카드인에 우호적이었던 우르 3왕조 때는 앙숙이었던 라가쉬 왕조를 왕명록에서 제외시켰으며, 서기전 1817년, 이신 왕조 때는 자신들의 역사를 우르 3왕조 뒤에 이어붙였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덮는다고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땅속에 묻혔던 수많은 사료를 모두 없앨 수는 없었고, 후대의 역사가들은 수메르가 키쉬가 아닌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남쪽 우루크에서 일어난 문명이며, 라가쉬라는 대제국이 존재했었음을 밝혀냈다. 또 진짜 수메르인의 왕조와 이방인의 왕조를 구분해내며, 보다 진실에 가까운 수메르의 역사로 보정해 나갔다. 이로써 왕명록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찾고자 했던 악카드인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계보를 이용했던 형식은 후대에 발생한 민족들에 영향을 미쳤다.
수메르 왕명록은 왕의 이름과 통치 기간을 반복하여 나열하고, 대홍수 이전의 역사부터 이후의 역사까지 다루며, 대홍수 이전 한 사람당 10,000년이 넘던 비현실적 통치 기간이 홍수 이후 점차 현실적으로 줄어드는 형식을 취한다. 그런데 자신들이 최초의 인간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히브리 민족 또한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족보를 써내려갔다. 그들의 족보를 보면 조상의 이름과 나이를 반복하여 나열하고, 대홍수 이전부터 이후의 조상까지 다루었으며, 대홍수 이전 한 사람당 약 1,000년에 가까웠던 비현실적인 수명이 점차 현실적으로 줄어드는 형식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악카드인들의 실패에 비추어 본다면,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족보는 증거에 의해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 승리한 패전,「카데시 전투」
서기전 1274년, 람세스 2세 치세에 이집트는 카데시 지역(現 시리아 서부)을 사이에 두고 히타이트와 전투를 벌였다.<사진3> 이를 ‘카데시 전투’라 한다.
오랫동안 역사는 이집트를 이 전투의 승자로 기억했다. 이집트는 ‘람세스 2세가 병력을 이끌고 신출귀몰하면서 히타이트군을 전멸시켰다’고 기록했으며, 벽화와 부조, 시로 이집트의 승리를 선전했기 때문이다.<사진4>
그러나 1834년 히타이트의 유적이 발견되고, 1930년대에 히타이트어를 해독할 수 있게 되면서 전투의 결과는 반전을 맞게 된다. 히타이트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철을 가장 먼저 제련해 내어 이용한 국가였다. 청동 무기로 무장했던 이집트군은 철기와 전차를 사용하는 히타이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매복해 있던 히타이트군이 오론테스 강줄기에서 추격해 오던 이집트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완전히 승패가 갈렸다. 람세스 2세는 간신히 퇴로를 만들어 목숨을 건졌다. 이집트 군대는 퇴각했고 카데시는 히타이트의 식민지로 남았다. 이집트군이 철수한 후에도 히타이트는 계속 진군하며 이집트의 주요 거점과 동맹국을 복속하는 등 분명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집트의 수장 람세스 2세가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갔고, 전투 이후에도 이집트는 여전히 강대국이었으며, 당시에는 대중들이 전투의 결과를 알 수 있는 매스컴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이집트는 자신들이 승리한 것으로 기록하여 국가의 자긍심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고학과 역사학의 발전은 다시 한번 조작된 역사에서 진실을 드러나게 했다.
▣ 건국 신화를 역사로 삼다
1세기 말, 로마 시대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의 시초부터 본인이 살던 당대까지, 이방인 독자를 위한『유대 고대사』를 저술했다.<사진5>『유대 고대사』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지만 땅이 짙은 암흑에 덮여 보이지 않고 바람이 그 표면 위로 운행하자, 하느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셨다. … 이는 사실 ‘최초의 날’(the first day)이었다. 하지만 모세는 이를 ‘하루’(one day)라고 했다.”
『유대 고대사』총 20권 중 절반에 해당하는 10권이 아담과 이브의 창조로 시작되는 히브리 성경의 역사 사건들을 따른다. 우리는 단군 신화를 믿지 않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세계 창조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역사가 확고하고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있다고 믿는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2천 년 유랑 속에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학살에서도 끝내 살아남아 독립을 쟁취한 뛰어난 민족”이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만들어진 유대인』의 저자 슐로모 산드는 ‘유대 민족’이란 개념은 ‘신화를 사실로 만들고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온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라고 얘기한다. 유대인이란 유대교도일 뿐 민족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그 종교의 신화를 민족의 역사로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고고학, 역사학, 과학적 증거들은 이미 충분했다. 슐로모 산드는 책의 머리말에서 본인이 인용한 자료는 대부분 예전부터 이스라엘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라고 했다. 다만 그중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것, 역사학자들이 즉각 은폐해버렸던 것, 망각되었던 것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계에는 이미 알려져 있던 사실인데 반해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데다, 교육시스템에 적용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고 했다.
슐로모 산드의 주장처럼, 유대 민족의 역사가 신화를 실제 역사로 변모시킨 신화역사(mythistory) 내지는 유사 역사학(pseudohistory)임을 뒷받침하는, 이미 알려져 있다던 사실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는 그의 저서 『만들어진 유대인』에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과학적 역사성을 잃게 될 여러 성서의 내용들을 소개했는데, 그중 첫 시작인 창세기에 관련된 사실들만 몇 가지 짚어보기로 한다. 창세기는 그들의 역사서의 중요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소설이나 극의 설정과도 같은 것으로, 삼단 논법에 비유하면 대전제에 해당한다. 대전제가 틀리면 소전제가 무엇이든 결론에 오류가 생긴다. 대전제가 거짓이라면 소전제가 무엇이든 결론도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창세기에 나오는 블레셋인과 아람인들은 고고학적, 금석학적 증거를 보았을 때 빨라야 서기전 12~11세기 등장했다. 낙타 역시 서기전 10세기가 시작할 무렵에야 가축화되었고, 운송수단으로 쓰인 것은 서기전 8세기부터다. 그리고 창세기에 언급된 이름의 다수는 서기전 7세기~6세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이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내려오는 창세기의 족보와 구약의 몇 가지 사건들의 햇수를 더해보면 인간과 지구의 역사가 현재까지 약 6,000년이 된다고 주장하나, 성경의 무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상부인 現 터키 지역, 심지어는 그들의 국가인 이스라엘에서도 지금으로부터 9,500~12,000년 전 유적이 출토되었다.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는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가 있다.<사진6> 1994년부터 독일 출신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가 이끄는 발굴조사단은 20년간 이 지역을 집중탐사하고 발굴하여 괴베클리 테페가 적어도 약 1만 2천 년 전의 신전 도시 유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1만 2천 년 전이면 맘모스가 살았던 시대이다. 인류 최초의 도시 유적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예리코나 터키의 차탈회위크보다도 약 2,000년이나 앞선 문명이 발견된 것이다. 2014년 8월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는 인류 최초의 신전 유적으로, 멀리 160km 떨어진 곳에서 참배하러 올 정도로 중요한 종교적 순례지였다.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T자형 돌기둥들이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는 신전터가 23개 가량 확인되었는데,<사진7> 기둥에는 단순한 원시시대 예술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묘사가 탁월한 동물들의 조각이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었다.<사진8> 괴베클리 테페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아직 유적의 10퍼센트만 발굴된 상태로, 지금의 인원으로 완전히 발굴하려면 수십 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와 같은 건축 양식이 그 시대, 그 지역에서 비교적 흔한 건축물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T자형 기둥이 원형의 구조물을 이루고 있는 고고학 유적지는 지금까지 총 12군데가 발견되었고 2021년 6월엔 괴베클리 테페에서 11개의 새로운 건축물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특히 괴베클리 테페로부터 36km 떨어져 있는 카라한 테페는 그 규모가 괴베클리 테페에 준하며,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시기인 11,00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어 아직 1% 정도만 발굴된 상태지만, 동물들이 조각된 T자 기둥 250여 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터키 중부에서는 9,500년 전 지어진 인류 최초의 도시 유적 중 하나인 차탈회위크가 발견되었으며,<사진9,10> 예루살렘에서 36km 떨어진 예리코(=성경의 여리고)도 10,000년전 지어진 인류 최초의 도시 유적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사진11,12> 차탈회위크는 이미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예리코는 팔레스타인에서 202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신청하였다. 그만큼 이 유적들의 역사적 사실은 신뢰할 수 있으며, 역사적 가치도 높다. 이러한 유적들의 발견은 인류사를 뒤흔들 만한 발견이지만, 매스컴이 상당히 발달된 시대인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발굴되고 있음에도 인지도나 관련 서적의 편찬은 부족한 편이다.
구약을 경전으로 삼는 아브라함계 종교들은 성서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고학적 발견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그들의 바람에 반하는 증거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에 대해 슐로모 산드는 “그리스도교의 발굴가들은 성서의 권위를 해치지 않도록 구약성서의 모순을 피하려고 이미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순점이 발견된다면, 이들은 언제나 고고학적 결과보다는 성서 텍스트가 말하는 진실을 먼저 택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출애굽에 대한 이집트의 기록은 단 한 건도 없지만 이스라엘 역사가들은 이것을 오랫동안 무시해왔다. 유대 문화에서는 출애굽기에서 유래된 유월절 축제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고, 유대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있어서도 출애굽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겐 출애굽을 세부적으로 검토하는 것에 대해 완강한 거부 심리가 있다고 한다.
인간은 이미 알고 있는 신념이 실제와 불일치할 때, 인지 부조화로 인해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 불편함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불편함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는 사실을 무시하는 방법, 합리화하는 방법, 사실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방법 등이 있지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잘못을 인정하고 실제에 맞게 신념을 수정하는 것일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개인이나 조직, 국가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문화, 성격, 가치관, 능력 같은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역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조직도, 국가도, 자신이 채택한 정체성에 의거해 행동한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오세아니아 관료들이 역사를 새로 쓰려고 기를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역사가 거짓이면 그 정체성도 거짓이다. 사기꾼은 자신이 거짓말이나 사기를 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할 뿐. 진실을 도구로 거짓을 구분해본다. 누가 사기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