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율법의 실천
“신앙촌의 시작”
하나님께서는 자유율법을 가르쳐 구원의 근본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신앙촌은 자유율법을 지키며 의로워질 수 있는 환경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마을입니다.
자유율법을 지키며 양심에 어긋남이 없는 생활. 그 실현의 본보기가 주인 없는 상점입니다.
주인 없는 상점의 전통은 지금도 신앙촌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외국의 원조 없이 자발적 건설을 하고 있음은 기적이다.
‘주인 없는 상점’은 우리 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신보 1958.7.10.
소사신앙촌
“한마음 한 뜻으로 세운 희망”
소사신앙촌이 설립된 1957년은 한국전쟁 직후
경제적으로 피폐해지고 정신적으로 마음의 기둥을 잃어 방황하던 시기였습니다.
신앙인의 협동과 근면으로 세워진 신앙촌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에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現 경기도 부천시
1957년 설립
소사신앙촌 건설 부지는 뱀골이라 불리며 사람이 살지 못하던
황폐하고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1957년 11월 1일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1,000여 명 교인들은 건설대로 조직되어 43만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설 2개월 만에 주택 57동이 완공돼
280세대가 입주했으며 1년 만에 300여 동의 주택과 50여 생산 공장,
각급 학교가 건설되어 만여 명이 생활하는 도시가 세워졌습니다.
경인 도로에서 약 8백 미터 언덕을 넘어서면 2만의 인구를 가진 소도시를 볼 수 있다. 소사신앙촌에는 아름다운
이색적 양옥 주택들이 자연의 신록에 수놓은 듯 배열되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느낌을 주며 집집마다 정원엔 꽃을 가꾸었다.
주택 A형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
신앙촌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스러운 얼굴, 명랑한 어린이들, 정직한 모습, 이러한 인상은 한국에 착임하면서
부터 서울 거리의 구걸하는 불행한 어린이들과 심각한 이야기만 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에도
이러한 곳이 있을까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신앙신보 1964. 11. 30.
시온유치원 원생들과 교사들
100여 종의 제품 생산
외국의 원조만 바라며 제대로 된 제품이 없었던 그때,
신앙촌제품은 최고의 품질로 다른 기업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재정은 아주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신앙촌에서는 건전한 자립 경제가 실현되고 있었다.
정권 불안 시대와 생활고 속에서 태어난 신앙촌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안락한 곳일지도 모른다.
신앙촌을 방문한 미국인 도시학자도 “완전한 이상향”이라며 놀라워했다.
1964.9.20. 아사히 신문
덕소신앙촌
“정직한 제품과 산업 발전”
1962년 7월 20일, 現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도곡리 일원의
10만 평 부지에 두 번째 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주택 지대, 경공업 지대, 중공업 지대로 나누어 착공 7개월 만에 6,000여 명의 교인이 입주했습니다.
박태선 장로는 매일 덕소에 나와 제2의 신앙촌 공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 거대한 규모의 공사는 보통의 노력이나 기술로는 3~4개월의 짧은 시일 내에 성과를 거두기 힘들 진척이었다.
건설에 참여한 제1신앙촌 신도들이 게으름 없이 서두른 덕택이라고 한다.
現 경기도 남양주시
1962년 설립
덕소신앙촌 공장 지대
덕소에서 생산되는 상품 수송과 신도들의 교통을 도모하기 위해 100톤급의 철선을 건조하고 있다.
이것이 완성되면 한강을 따라서 마포전도관 앞까지 운항을 하게 된다.
1962.12.16. 서울경제신문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엄청나게 큰 전기로는 순전히 신앙촌 자체의 기술진에
의해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것.
모든 일에 그러하듯이 박태선 장로의 진두지휘 아래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70.9.27. 주간조선
“제당 회사를 경영하는 유수한 실업가가 ‘이거 큰일 났습니다. 신앙촌 라벨을 붙여야만 쪽을 쓰니
가짜 신앙촌 라벨이라도 붙여야 하겠어요.’ 하면서 비명을 올리더군요.
그래서 내가, 당신네들은 남겨 먹을 생각만 가지고 물건을 만들고, 신앙촌에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양심껏 생산을 하니 그렇게 되는 거요. 당신네들도 새 마음을 가지고 양심껏 해 보라고 충고했습니다.”
“덕소신앙촌의 합리성에 놀랐지요. 건설하고 공장을 돌리는 모든 것이
고도의 합리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공장 종업원이 감독자도 없이 신앙이 주는 양심을 따라 온 정성을 다하여 일하는 데
큰 감명을 받았지요.”
신앙촌 주민들은 모두 활기가 넘쳐 보였다. 옷차림도 밝은 원색 계통이 많으며 표정이나 행동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은 깊은 신앙생활에서 오는 것으로 보였다. 신앙촌은 3가구에 1대 정도 피아노와 오르간(모두 신앙촌 제품)이
있으며, 텔레비전 수상기도 1백여 대를 갖고 있어 중류 이상의 생활 수준이다.
1970.9.27. 주간조선
“난 놀랐소. 우리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을 보고 눈물이 나왔소.
한국에 와서 여러 사람 만나 봤는데 전부가 절망뿐이에요. 그런데 거기 가서
보고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세계를 다 돌아보았지만 신앙촌 같은 곳은 없어요.
국민 전체가 감사할 일입니다.”
1965.5.24. 신앙신보
기장신앙촌
“실천하는 신앙인”
1970년 2월 28일, 現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130만 평 부지에 세 번째
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1972년 6월경까지 1동, 2동, 3동의 대형 공장 건물 및 각 공장 건물, 기숙사, 주택 등을 완공했습니다.
주력 기업이었던 시온합섬은 언론에서 동양 최대라고 보도할 정도로 대규모 공장이었습니다.
現 부산시 기장군
1970년 설립
기장신앙촌 수예공장
신앙촌 기업은 2000년대를 앞두고 미래 산업인 식품 산업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사신앙촌 시절부터 명성을 쌓아 온 두부와 간장을 첨단 시설을 갖춘 신공장에서
생산하고 발효유 시장에도 진출해 요구르트 런을 출시했습니다.
현재 모습
2000년대 들어 소사와 덕소 신앙촌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어 현재 신앙촌이라 하면
제3신앙촌인 기장신앙촌을 말합니다.
신앙촌의 아름다웠던 모습은 그 시대를 걸어온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신앙촌은 1957년 소사신앙촌을 건설하시며 하나님께서 명명하신 이후로 천부교의 또다른 이름이 되었습니다.
천부교의 중심지 신앙촌은 주거와 생산, 교육과 종교 시설을 갖춘 신앙인의 도시입니다.
교인들을 위한 예배와 전도 행사가 활발히 열리며 1년 열두 달 견학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설립된 신앙촌
신앙촌에서는 그 소망을 향해 4대가 한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부교의 초창기부터
이 길을 따라온 어르신들은 신앙의 모범이 되시고
젊은 세대는 신앙촌 기업과 판매 현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후배들의 멘토가 되고 있습니다.
실천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신앙촌 사람들은 오늘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갑니다.